네게 만월은 무엇이었어?
* * *
보름이다. 설은 아직 채 어두워지지 않은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손에 쥔 작은 다이어리에는 옅은 푸른색으로 두 개의 숫자가 적혀있었다. 1과 5. 음력 날짜가 인쇄되어 나오지 않았으나, 며칠 전 그 위치에 설이 직접 적어두었다. 원체 비좁은 칸에 공간을 차지하지 않게끔 쓴 날짜는 멀리서 보면 점같기도 했다. 아침마다 펼쳐보는 다이어리 속 유일하게 표시된 음력의 하루였다. 특별한 연유는 없었다. 설은 단지, 만월이 보고싶었다.
곁에 있던 다이얼 전화기가 울렸다.
"여보세요?"
"설아 이 모래시계, 고치기 어렵다는데. 어떻게 할까."
수화기 너머는 설의 아버지였다. 산장 아래로 내려가는 김에 모래시계의 수리를 부탁했었다. 거진 몸체만 남은 상태였고 아니나 다를까, 불가한 모양이었다.
"그냥 그대로 가져와주세요. …아녜요, 괜찮아요. 두 번 오가게 해서 죄송해요. …네. 네, 조심히 오세요."
자신보다 더 안타까워하는 목소리에 설은 웃으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역시나. 고칠 수 없으리라는 건 예상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못이 박히니 맥이 빠지고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던 설은 잠깐 전화기를 흘겨보았다. 이렇게 잠자리 가까이 두었으니 하루의 좋은 소식부터 물어다주면 안될 일인지. 하나뿐인 소식통이 영 탐탁지 않았다. 다이얼 전화기를 끄트머리로 밀어버리고 탁자에 두었던 은색 라디오를 헙탁 중앙에 두었다. 안테나를 세우고 휠을 돌렸다. 지직거리는 소리에 잇따라 짧막한 방송이 흘러나왔다.
…오늘 밤에도 어김없이 폭설이 내릴 것으로 보입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렴풋한 기억이 끊길 무렵이었다. 꿈에서 깬 설의 침대 위로 모래시계가 깨져있었다. 한줌에 들어올 크기였기에 바로 알아챈 것이 의아했다. 바스라진 유리조각이 햇살도 없는 밤에 속절없이 반짝였다. 흘러나온 까만 모래는 손을 대면 힘없이 아래로 떨어지거나 공중에 흩어졌다. 이불이 희지 않았더라면, 평범히 일어나 침대 정리를 했을지도 몰랐다.
이미 쓸모를 다한 모래시계를 설이 다시 세우자 끄트머리에 달려있던 파편이 떨어졌다. 좀 더 단단해보이는 위아래의 둥근 판만이 겨우 원래의 형태를 암시하고 있었다. 분명 그 모습이 너무 앙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더 흐트리지 않고 일어나려던 설의 시야가 희뿌옇게 막혔다. 눈가를 눌러 막아보려해도 소매가 젖어들어갈 뿐이었다. 어째서. 그렇게 설은 한참을 울고, 또 울었다. 울음을 그치는 방법따위는 떠오르지 않았다. 전부가 흘러나와 메말라줄 때까지 버틸 뿐이었다.
"…."
계속 눈물을 닦아낸 탓에 눈가가 아렸다. 빨갛게 부어 흉한 몰골이겠지, 설은 그제야 산장에 손님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더이상 나올 눈물도 없는 만큼, 힘도 같이 잃어버린 채로 버릇처럼 이부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까만 모래를 먼저 한 곳에 모으고, 유리조각을 그 옆에 두었다. 정신을 차리니 처음 보는 모래시계였다. 검은색을 좋아하지 않는 설에게 아버지가 만들어주었을 리도 없었다. 자신의 것도 아닌, 원 주인도 알 수 없는 망가진 물건 때문에 울었던 걸까. 후련함 없는 먹먹함이 밀려왔다.
어두운 하늘은 여전했다. 밖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눈이 내렸다. 퇴창의 바깥틀이 점차 소복히 쌓은 눈에 덮여갔다. 달빛은 드물게 들어왔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설은 방을 나서기 전에 전화기 다이얼을 돌렸다. 방문을 열면 인기척 없는 산장을 맞이해야했다. 텅 빈 공간을, 버틸 여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아버지의 귀가를 독촉하고 싶었다. 모래시계의 수리를 맡긴 건, 그러니까 그 뒤. 산장에 돌아온 아버지께 운 티가 역력한 얼굴을 변명하기 위함이었다.
아버지가 산장에 돌아온 건 저녁 즈음이었다. 저물어가는 해를 등지고 산장 문을 열었다. 맡겼던 때와 같이 모래시계는 나무 상자에 담겨 설에게 반납되었다. 안에 든 물건이 작으니, 상자도 손바닥을 넘지 않았다.
하루는 똑같이 흘렀다. 눈을 치우고, 끼니를 챙길 요리를 했다. 틈새에는 책을 읽었다. 산 중턱에 자리한 오두막집에서 시간을 떼울 일거리는 한정적이었다. 간혹 손을 많이 요할 때도 있었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창문에 낀 서리는 심하지 않았고 아래층의 한쪽 벽을 차지하고 있는 벽난로도 불을 잘 지켰다. 장작이 타는 소리는 설의 움직임, 또는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에 묻히곤 했다. 안온한 따뜻함과 일상적인 추위가 오두막집 안에서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설은 게으름을 피우는 것 같아 괜스레 부던히 움직여 보았다.
많으면 한 주에 한두 번, 적으면 한달에 두세 번씩 산장에는 손님이 찾아왔다. 주로 산을 오르다 적당히 하산할 때를 놓친 이들이었다. 산장에서 지내려 오르는 사람들은 식재료를 주문하는 횟수만큼 적었다. 근 일주일 동안 방이 찼던 일이 없는 건, 별난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빈 방은 사람의 손길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야말로 이상했다.
모든 방을 혼자 단번에 청소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나마 상태를 보고 점검하는 건 아버지의 몫이라 낫다하더라도, 손님용 방뿐만 아니라 설과 아버지의 방, 복도, 더불어 공용으로 쓰는 거실까지 합하면 더더욱. 설은 자그마한 꾀를 써 방들마다 요일을 두고 청소했다. 월요일은 복도 끝의 두 방. 수요일은 그 다음 방들…, 거실이나 아버, 자신의 방은 틈틈이 눈을 두었다. 그러니 설에게 쓸데없이 부지런히 일했다는 말은 루틴을 깨고 다른 방들도 들여다보았음을 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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