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우에게
안녕, 잘 지내?
생일 편지가 아닌 편지를 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라서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너한테는 그마저도 쓰질 않았었으니까, 더 그렇기도 하고.
나는 자주 잘 지내고, 가끔 못 지내고 있어. 너는 벌써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려나. 하루하루가 정말 바쁘기는 해. 잠잘 시간도 부족하고, 사실 잠을 잘 자리도 부족한 것 같아. 어쩌면 이렇게 편지를 쓰는 일도 사치일 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지 않는 자리를 찾아서 자리를 잡고, 펜을 들어서 문장을 적는 일도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게 참 새삼스러워.
얼마 전에 말이야, 내가 가끔 편지를 쓴다는 걸 눈치챈 엄마가 나한테 작은 함 하나를 선물해 주셨어. 어떻게 보아도 간이 보석함 안쪽을 긁어낸 것 같은데, 우연히 찾은 거라며 나한테 억지로 안겨주더라. 나는 그냥 고맙다고 했고, 엄마는 내 어깨를 어색하게 두드리고 갔어. 부치지도 않은 편지는 어떻게 했는지, 수신인이 존재하기는 하는지, 애초에 쓰는 이유는 무언지. 해야 할 법한 질문은 하나도 하지 않고 말이야. 모르는 척 묻어주셨으니 감사할 게 분명한데… 이상한 억하심정이 같이 들더라. 이상하지. 음, 토라졌다는 말도 잘 들어맞진 않지만, 그래도 그나마 가장 비슷한 단어인 것 같아. 사실은 은근히 물어봐 주길 바랐던 걸까?
그 함을 받은 날에, 입지 않은 옷의 안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종이 몇 장을 꺼내서 같은 크기로 접어 함 안에 넣어두었어. 세어보니까 넉 장쯤 되더라. 편지봉투가 없이 멋대로들 펼쳐져 듬성듬성 들어간 탓에 꽤 많이 찬 것처럼 보이더라고. 그리고 그대로 함을 들고 한참 앉아 있었던가. 함이 양손으로 들면 적절한 크기거든. 뚜껑은 닫지 않고 열어 두었고, 안쪽을 보다가도 무슨 소리가 들리면 바로 고개를 들었어.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걸 이미 확인하긴 했지만, 괜히 신경이 곤두서있었지. 조금 채워진 함 안을 바라보다가 하릴없이 울적해지고 마는 일이 왜 부끄러웠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어. 창피했던 것도 같고, 염치없이 느꼈던 것도 같아. 네 말을 따라 이곳으로 돌아온 거긴 하지만, 그래도 그 선택이 '그쪽'에 미칠 영향을 몰랐던 건 아니니까. 아마 그래서가 아닐까. 그게 아니고서는 네 생각을 할 뿐인 일에 알 수 없는 수치심을 느낄 리가 없잖아.
채우야, 나는 네가 딱 나만큼만 못 지냈으면 좋겠어. 나랑 비슷하게 고생하고, 비슷하게 힘들기를 바라. 편지는 보통 안녕을 바라야 하는데, 왜 이런 말을 쓰게 되는지는 너도 알 거라고 생각해. 그야 너도 나한테 마지막에 얼른 가버리라고 했으니까. 아, 다시 생각해도 그 말은 진짜 나빴다. 만약 그 날 내게 조금이라도 더 시간이 남아있었더라면 나는 너한테 비겁하다고 소리치고 왔을 거야. 참 다행이지. 우는 얼굴까지 보였는데 마지막 말이라도 좋아야 하지 않겠어. 우리한테 예비된 시간이 그뿐이었던 데에도 의미가 있었으려나. 나는 여전히 신은 싫지만, 운명 같은 우연은 있길 바라게 된 모양이야. 그러니까 부탁이니, 꼭, 나랑 같은 만큼이어야 해. 너무 부족해서도 안 되지만, 넘치지도 마. 장미 아치 아래에서 빈 소원은 어디에도 내뱉을 수 없으니, 이 말만으로도 네가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다.
슬슬 밤이 깊었네. 해가 기운 다음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기온이 떨어진다는 게 피부로 느껴져. 오늘은 내일을 위해서라도 이만 자야겠지? 언젠가 네게 이 편지들을 다 부칠 수 있으면 좋겠다. 싱크홀이 만들어질 위치를 알 수 있다면 그 위에 올려두기라도 할 텐데…….
잘 자, 좋은 꿈 꾸고. 부디 그 꿈 안에 내가 있기를
5월의 어느 날에
이화연이
'Nov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원의 형태(前) (0) | 2022.10.27 |
---|---|
Ruined Letter (0) | 2022.10.19 |
연은, (0) | 2022.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