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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가 편지지의 맨 위 왼편에 작은 원을 만들었다. 아직 펜촉을 대지도 못했는데, 잉크는 제멋대로 흘러나오더니 기어코 새하얀 시작을 망쳤다.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이미 망친 종이에 글자를 잇는다해도 버려야했다. 펜촉을 제자리로 되돌리고, 헌 것이 된 편지지를 반으로 접었다. 마르지 않은 잉크가 반대쪽으로 샜다. 완전히 쓸 수 없게 되었다. 기울어지지 않는 의자에 몸을 늘이듯 기댔다. 다시 앞으로 숙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들지 않았다. 잉크가, 번졌다. 색이 옅어졌다. 찍어먹어본다면 쓴맛이 날 것 같았다. 달지는 않아. 짠맛이 날만큼 많이 흐려지지도 않았다.
"모르겠어…."
단말마 같은 울음이었다. 한 글자, 용납될 수 없을 말 한 마디마저 적어내려야했다. 머리와 달리 손은 새로운 편지지를 꺼낼 수 없었다. 멀끔한 오른손을 펼쳤다. 편지지가 아닌 손바닥에 새기는 게 차라리 더 쉬워 보였다. 펜은 쥐고 있지 않았다. 있는 자국은 손금과 자잘한 굳은살이 전부였다. 새하얬다. 잉크도 묻어있지 않았다. 손에 수없는 말들을 새기고 검어진다면, 검붉은 덩어리로 변해버린다면 그때는 편지를… 편지지와 함께 구겨 버리며 나는 내 확신을 경멸했다.
옆구리가 시큰했다. 몸에 무리가 와 드는 통증은 아니었다. 상의를 다시 입기 전에 오른쪽 몸을 내려다봤다. 한 귀퉁이에 이제는 반점 같아진 화상자국이 있었다. 바보같은 실수였다. 표적은 처음이라 하더라도 총은 처음이 아니었다. 저격이 가능하도록 교육받아왔고, 우수한 학생이라 평가받았다. 단지 발사된 지 얼마 안된 리볼버를 황급히 숨겨야 하는 경우는 없었다. 지금까지 해온 모든 학습들은 안일함 속 허상에 불과했다.
까슬한 손을 상처 위에 대었다. 통증은 없었다. 올라온 건 같은 온도의 미지근함뿐이었다. 동일한 온도의 피가 흐르는 몸은 어디를 만져도 비슷한 감촉이었다. 소스라칠 만큼의 열기는 하루를 채 가지 못했다. 물집이 생기고 살의 표피가 밀렸을 때는 이미 미지근했다. 한순간 내 몸이 따뜻한 편이라 말한 누군가가 떠올랐다. 누구였지.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기억력이 감퇴하는 걸 느꼈다. 한번도 보지 못한 사용인이라도, 이름은 성까지 외워왔었다.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나."
모든 사용인들을 물렸기에 환복 중의 중얼거림을 들을 이가 없었다. 필요성의 부재는 나만의 이야기였다. 아니, 아니지. 이제는 한 명이 더 있었다. 왼쪽 손목의 단추를 채우면서 강제로 초대한 또다른 주역을 떠올렸다. 맞은편 방에서부터 당장이라도 문을 박차고 들어와 플롯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항의하는 모습이었다. 나는 미안해하며 웃었다. 벽난로에 낡은 책을 태우듯이 모든 이야기를 없던 일로 만들었다.
"…."
단추가 손톱에 걸려 딱, 하는 소리가 났다. 상상은 홈에 알맞게 들어간 단추와 함께 멈췄다. 돌아본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나는 타이가 카라의 정가운데에 오도록 빠듯하게 맸다. 옷을 다 입은 후, 바닥에 발을 끄니 질감이 느껴졌다. 짧은 궤적이 긴 찰나 같았다. 양말의 색이 보일 정도의 환함과 그를 주는 커다란 창. 먼지 한 톨 없이 청소된 화려하고 정갈한 방. 궤적 안에 하나로 우겨넣기에는 넘치는 것이 많았다. 포기하기로 했다. 불가능한 일을 붙잡기보다 문을 열고 나갔다. 나가는 길에는 사용인을 불러, 편지를 하나 맡겼다.
"아메에게 전해."
나는 애칭을 선호했다. 명칭을 친근하게 바꾸는 것만으로 꽤 많은 일을 생략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날도 애칭을 불렀다. 아메. 무례에 가까운 친밀감을 잔뜩 넣어 포장한 어절을 선물했다. 부모님은 대수롭지 않아했고 나도 다르지 않았다. 앙트르메 가에 처음 온 여자아이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손님이 아닌 가족을 초대하는 사람들에게 지었던 첫 표정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접힌 건 최근의 기억인데 어릴 적 일까지 바래져 있었다. 누렇게 변질된 양피지가 녹여낸 글자처럼 시간에 녹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대수로울 일이 대수롭지 않았다.
다섯 번을 접다 잘못된 부분이 접혔다. 바래진 게 아니라 구겨진 거라 뒤바꿔봤다. 아니면 아까의 편지지 마냥 접다가 잉크가 퍼졌다든가. 어느쪽이든 결론은 같았다. 알 수 없었다. 표정, 감정, 생각, 움직임 전부. 선명한 건 아집과 같은 애칭뿐이었다. 내가 불렀던 이름과 내가 불렀던 이유. 모든 잔해들의 주체는 '나'였다. '네'가 어땠는지는 전부 희미해. 어째서야? 마지막 방아쇠를 당기며 물었다. 왜인지 나도 알고 있어. 달려온 이를 보고 답했다.
"…네가 살면, 나도 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답을 편지에 적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제와 쓰기에는 늦었다. 내게는 편지지도, 잉크도 허락되지 않았다. 흐려지는 손으로 펜을 잡기란 불가능했다. 언제나 소유하던 온기는 겨울밤의 차가움에 죽고 없었다. 검은 붉은색만이 아직 살갗 아래에 흐르고 있었다. 아물지 못한 흉터들이 문신처럼 몸 구석구석에 새겨져 있었다.
"마지막이니, 아메에게 키스하길 바란다해도?"
나의 마지막을 눌러담아. 지금이라도. 허무맹랑한 기대와 무책임한 전달 방식이었다. 입맞춤 따위가 모든 걸 해결할 리 만무했다. 그를 증명하듯, 너는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말했다. 이미 탄환을 다 소모한 나 대신 방아쇠를 당겨줄 뿐이었다. 탕. 앙트르메 가 정원을 울린 파열음이 내게 알렸다. 이번 편지도 망쳤어. 한 어절도 전하지 못했어. '아메'조차. 쇼 앙트르메, 나의 편지는 전부 망친 편지였다.